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교회는 없을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누구든지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속에 감격과 눈물, 은혜가 가득한 교회를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던 끝에 고양시 지축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원수 같던 아버지가 쓰러지다
저의 아버지는 목회자 셨습니다. 평생 가난하고 힘들게 목회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길은 왠지 가기 싫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대학 디자인과를 진학해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약 1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공허함이 맴돌았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7호선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받지 않는데 어쩐 일인지 부재 중이 3번이나 찍혀있어서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OOO 씨 아드님 되시죠? 여기 한림병원 응급실인데요 아버지께서 쓰러지셔서 실려오셨어요 빨리 오세요"
갑자기 심장이 덜컥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보이스 피싱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는데 전화번호를 조회해 보니 병원이 맞았습니다. 다급한 마음을 뒤로 하고 급하게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급성 식도 파열로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담당 의사는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그 시간이 골든 타임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해당 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순천향 대학병원으로 옮겼습니다. 흉부외과 전문의가 와서 하는 말이 식도 파열은 당장 수술을 해도 20%의 성공률이 있는데 약 7시간 정도 지나는 사이 흉부가 많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살 수 있는 확률은 10% 밑이라고 했습니다.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목회가 어려워지시고, IMF 때 교회 건축이 힘들어지면서 교회의 성도들이 다 떠나 평생을 외로움 속에서 지낸 아버지였습니다. 더 가슴 아팠던 것은 그런 아버지와 저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습니다. 수년 전 어머니가 먼저 소천 하시고 교회는 계속 어려웠습니다. 겨울에 난방비가 없어서 덜덜 떨면서 예배를 드린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데 왜 저렇게 힘들어할까 당시 저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힘을 내면 되지 왜 그렇게 독선적이냐고 말하며 밥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같이 느껴졌습니다. 119에 실려오는 응급 환자들이 들락날락하는 정신이 없는 상황에 눈물만 흘렀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설을 쏟아냈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기운 빠져 있을 건데?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고!"
"병들긴 뭐가 병들어!"
하면서 아버지와 다투는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져왔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아빠 미안해
"흉부가 너무 많이 부패해 있습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너무 안 좋네요"
아버지는 긴급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해봐야 알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수술실에 들어가셨습니다. 8시간 넘게 수술을 하고 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흉부가 너무 많이 부패해 있습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너무 안 좋네요"
처음에 갔던 한림 병원의 의사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골든 타임을 지나게 만들고 한 사람의 목숨을 버리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15명 정도 되는 작은 개척 교회였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제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주범이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교회 가서 밤새 기도하고, 출근한 뒤 점심시간에 또 기도하고, 퇴근하자마자 교회에 가서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우리 아빠 이대로 죽으면 안 돼요,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게 해주세요. 깨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일까요? 중환자실에서 아버지께서 의식을 회복하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중환자실 면회는 30분밖에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간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기계에 연결된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었습니다.
중환자 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버지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셨습니다. 저도 감정이 복받쳐서 아버지를 안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아빠 미안해, 내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버지는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어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사랑과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빠도 미안해 아들'
그렇게 저와 아버지는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 양을 치라
아버지의 상태는 조금 양호해져서 일반 병실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식도가 파열되어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음식 섭취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에 매일 교회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고쳐달라고 울며 불며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간절히 기도를 하는 중 성령님의 강한 임재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만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물음이 마치 저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전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내 양을 치라." 그리고 또 물어보시는 듯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이렇게 세 번 말씀하는 강한 인상을 느꼈습니다. 순간적으로 마음속에 빛처럼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나를 목회자의 길로 부르시는구나' 그리고 뒤이어서 이런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신학 대학원을 가거라'
그런데 그때는 5월이었습니다. 입학 시즌이 아니었죠.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지금은 입학 시즌이 아니에요. 다음 해가 되면 지원하도록 할게요."
그랬는데 마음이 계속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학 대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마우스를 떨어트릴 뻔했습니다. "서울 신학 대학원 후기 입학생 모집 중" 공고가 눈앞에 떡 나타난 것입니다. '아니…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정확하고 모든 것을 예비 하셨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더 신기한 사실은 저와 함께 기도하던 아내 또한 저와 같은 부르심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드라마틱 하십니다!
아빠! 하나님이 날 부르셨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낀 다음날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이 은혜의 경험을 나눴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대견해 하셨습니다.
"아들아 너와 같이 목회 하면 정말 신나겠구나."
한껏 격앙된 그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정말 알기가 어렵습니다. 점점 상태가 악화되어서 경련을 일으키시는 횟수가 잦아졌습니다. 그래서 상의 후 2차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혈소판의 수치가 너무 낮아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수치를 늘리도록 조치를 취한 후 2차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수술이 들어가기 전날 중환자실에서 면회 시간이 끝날 즈음 아버지께서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 오늘은 헤어지고 싶지가 않네……."
"에이, 아빠 왜 그래 수술하고 또 건강하게 만날 건데 괜찮아! 기도 많이 하고 있어 염려 말!"
이렇게 말했는데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조금 달랐습니다.
"아들아 만약에 아빠가 깨어나지 못하면 살리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말고 아빠를 보내줘."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염려 말고 수술하고 만나!"
"아빠는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
"응! 아빠 나도 사랑해!"
이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2차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셨고 그대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다시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아신 것 같습니다. 영원히 사랑할 거야 하는 말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저는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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